『명함이 사라진 자리』 다시, 나를 묻다
프린터에서 원고를 출력해 A5 크기의 책자로 묶었다. 화면으로 여러 번 읽었던 글인데도 종이 위에서 마주한 문장은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자연스럽다고 여겼던 대목에서 호흡이 끊기기도 했고, 비슷한 뜻을 불필요하게 되풀이한 부분도 눈에 띄었다.
연필로 표시해 가며 고쳐 썼다. 수정한 원고를 다시 출력해 읽고, 문장을 지우거나 순서를 바꾸는 과정을 거듭했다. 그렇게 내가 기억하는 장면과 글에 적힌 문장 사이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 나갔다.

『명함이 사라진 자리』는 그렇게 여러 번 읽고 고쳐 쓴 끝에 완성한 책이다.
직책이 사라진 자리에서 시작된 질문
28년 동안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 현장에서 엔지니어이자 리더로 살았다. 숫자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마련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문제 앞에 서면 늘 상황을 분석했고, 답을 찾아 조직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곤 했다.
하지만 조직개편으로 직책이 사라졌을 때는 무엇부터 분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집무실을 비우고 법인 차량을 반납했다. 평소처럼 회사로 출근했지만 이전의 내 자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익숙한 사람들과 동일한 공간에 머물면서도, 나 혼자 전혀 다른 세계에 서 있는 듯한 낯선 기분이 들었다.
직책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나를 설명해 주던 수많은 말마저 힘을 잃었다. 그제야 오랫동안 외면해 온 질문이 마음속을 어지럽혔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으로 나를 설명해 왔을까. 직책과 소속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나는 여전히 나일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단번에 답을 낼 수는 없었다. 서둘러 답을 찾기보다 지나온 시간을 담담히 돌아보는 일이 먼저였다. 이 책은 바로 그 성찰의 과정에서 출발했다.

기억을 기록하고, 기록을 다시 바라보다
처음에는 브런치에 한 편씩 글을 올렸다. 당시의 글은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장면들을 놓치지 않기 위한 기록에 가까웠다. 집무실을 비우던 순간, 멍하니 출근길을 서성이던 시간, 아무 일도 없는 버스 안에서 뒤늦게 터져 나온 눈물, 산을 걸으며 일어난 생각들을 담담히 글로 옮겼다.
브런치에 쓴 글이 바탕이 되었지만, 연재된 글을 단순히 한데 묶는 데 그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비어 있던 장면을 채우고, 시간의 순서를 바로잡으며 중복되는 단락을 덜어냈다. 작성 당시에는 명확히 알지 못했던 감정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다시 살폈다.
글을 고치는 작업은 지나간 과거를 과장하거나 미화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그때의 나를 불쌍하게 그리지 않으면서도, 다 괜찮았다고 조급하게 결론짓지 않는 일이 중요했다. 사실과 감정을 분리하고, 당시의 경험과 감정에 가장 가까운 문장을 찾고자 애썼다.
퇴고가 길어진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 문장들이 지나온 시간을 진실하게 담아내고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해야 했다.
파주와 수원을 오가며 다시 학생이 되다
50대 중반,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과정에서 코칭을 전공했다. 파주와 수원을 매주 오가며 다시 학생의 마음으로 강의실에 앉았다. 오랫동안 답을 제시하는 역할에만 익숙했던 내게 코칭은 새로운 삶의 태도를 요구했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질문을 건넨 뒤 기다려야 했다. 내가 옳다고 믿는 방향보다 상대가 다다르고 싶어 하는 곳을 먼저 살펴야 했다. NLP(신경언어프로그래밍)를 공부하면서는 하나의 사건이라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배움이 과거의 상처를 순식간에 지워 주지는 않았다. 다만 직책이 사라진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차츰 달라졌다. 사라진 것은 ‘직책’이라는 명칭일 뿐, 그동안 쌓아 온 경험과 인연, 그리고 다시 배울 수 있는 가능성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글쓰기와 산행 역시 그 변화를 이어 주었다. 산길에서는 속도를 줄여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고, 글을 쓸 때는 잠시 멈춰 바라보아야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의 결이 있었다. 빠르게 정답을 내리기보다 질문 앞에 오랫동안 머무는 지혜를 배워 갔다.
표지에 드림이를 담은 이유
『명함이 사라진 자리』의 표지에는 햇빛 드는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 하나가 등장한다. 오랫동안 곁에서 키워 온 카랑코에 ‘드림이’다.
드림이는 삶의 큰 변화를 굳이 말하지 않는다. 제자리에 멈춰 서 있는 듯 보여도 조용히 새 잎을 피우고 뿌리를 깊게 내린다. 줄기를 잘라 옮겨 심으면 낯선 흙 속에서도 다시 제 삶을 이어 간다. 책을 쓰는 내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삶의 전환 과정도 이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자리를 떠난다고 해서 살아온 시간과 가치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자리에서 다시 뿌리를 내리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창가의 드림이는 상실 이후 찾아오는 조용한 가능성을 가장 담담하게 증명하는 존재였다.

성공담보다 흔들림을 지나온 시간을 담다
이 책은 퇴직 이후의 화려한 성공이나 인생 2막의 거창한 정답을 말하지 않는다. 직책을 잃고 흔들렸던 한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온전히 직시하며 다음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담은 퇴직 에세이다.
조직개편 이후 출근하던 순간부터 파주와 수원을 오가며 이어간 배움, 코칭과 NLP, 글쓰기와 산행,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5부 20장으로 전해진다. 책의 끝자락에는 스스로의 삶을 반추해 볼 수 있는 DREAM 코칭 질문과 삶을 다각도로 바라보게 돕는 8가지 NLP 전제도 함께 담았다.
드라마틱한 변화보다 실제 흔들리고 다시 일어서는 솔직한 여정을 담았다. 답을 건네는 데 익숙했던 사람이 깊이 질문하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으로 변해 가는 기록이다.
이런 분들께 권해본다
직책이나 소속이 흔들린 후 자신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막막한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퇴직이나 이직을 앞두고 새로운 이정표를 고민하는 분, 오랫동안 가족과 조직을 위해 사느라 자신의 마음을 미뤄 두었던 분들에게 작은 울림으로 닿기를 바란다.
새로운 배움이나 글쓰기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느끼는 분들에게도 용기가 되었으면 한다. 삶의 전환이란 이전의 나를 부정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지나온 경험을 새로운 시선으로 재해석하고, 그 안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내는 일에 가깝다.
명함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
원고를 모두 정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처음 품었던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명함이 사라진 자리는 비어 있는 공허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28년 동안 묵묵히 쌓아 온 경험이 서려 있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남아 있었고, 언제든 다시 배움을 시작할 수 있는 동력이 존재했다. 무엇보다 타인이 준 직책이 아닌, 온전한 나 자신의 언어로 삶을 바라보게 만드는 질문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명함이 사라진 자리』는 그 질문의 궤적을 따라 걸어온 기록이다. 익숙한 역할이 흔들린 분, 지나온 삶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싶은 분, 삶의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분들과 이 정직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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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마음이 교감하는 기록
For Your Dream Life
by 드림맥스
